시골살이 현실 13편 : 나는 왜 마을에서 ‘튀는 사람’이 되었을까
도시에서는 개성이 존중받는다. 옷을 어떻게 입든, 집을 어떻게 꾸미든, 식사시간에 무슨 음식을 먹든, 타인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나답게 산다는 건 곧 자유롭게 사는 것이고, 도시의 삶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의 방임적 거리감 위에 구축되어 있다.
하지만 시골로 귀촌하면서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회적 감각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답게’ 산다는 말은 이곳에서는 종종 ‘이상하다’는 평가로 연결됐다. 처음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는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고, 마을 일에 참여하며 인사도 꾸준히 나누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말없이 혼자 행동하는 사람’,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곳에서 종종 경계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튀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공격할 때만 사용되는 건 아니다. 시골에서 이 말은 마치 경계선 바깥에 있다는 일종의 신호처럼 작동한다. 나는 왜 그렇게 이곳에서 보여지게 되었을까? 이 글은 내가 마을에서 ‘튀는 사람’이 되어갔
던 과정과, 그 이후 겪게 된 변화와 이해에 대한 기록이다.
마을은 ‘평균의 질서’로 돌아가는 사회다
귀촌 첫 해, 나는 도시에서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려 했다. 집 주변을 화초로 꾸미고, 중고가구 대신 새로 산 심플한 테이블을 놓았으며, 저녁엔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와인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을 즐겼다. 특별한 건 아니었다. 다만 나에게 익숙한 방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어르신 한 분이 내게 슬쩍 물었다.
“그 집은 밤에 왜 불을 안 꺼요?”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밤 11시까지 작업을 하거나 책을 보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불이 좀 늦게까지 켜져 있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며칠 후 이웃 사이에서 ‘저 집은 밤늦게까지 뭐 하느라 불을 켜두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이야기로 확대됐다.
시골에서는 일정한 생활 리듬이 공동체 전체의 무의식 속에 깔려 있다. 해 지면 문 닫고, 해 뜨면 밭 나가고, 여름엔 저녁에 다 같이 정자에 모이고, 겨울엔 오후 5시부터 다들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간다. 이 리듬은 법이나 규칙이 아니라 ‘평균의 흐름’이다. 그리고 누군가 이 흐름에서 벗어나는 순간, 마을 전체는 그를 인지하게 된다.
나는 아침 9시에 마당에 나갔고, 이웃들은 6시에 이미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장을 한 달에 한두 번 인터넷으로 봤고, 이웃들은 매주 오일장을 이용했다. 나는 이웃들과의 모임에서도 늘 조용히 웃고만 있었지만, 그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왜 말이 없을까?”, “무슨 속내가 있는 거 아닐까?”로 읽혔다.
시골은 빠르게 돌아가지 않는다. 대신 아주 천천히, 하지만 깊게 서로를 파악한다. 그 속에서 평균에서 벗어난 행동은 '개성'으로 보이기보다, ‘불균형’으로 해석된다. 내가 튄 게 아니라, 그냥 다른 리듬으로 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마을이라는 유기체 안에서는 그 다름이 곧 충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시선의 축적, 말 없는 평가가 쌓여가는 시간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마을의 일부 어르신들과의 대화에서 ‘한 템포의 어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분명 대화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멀어진 듯한 거리감이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지인이 마을회관에서 들은 이야기를 내게 전해줬다.
“누구는 맨날 혼자 살려고만 한다더라. 마을 일이랑 상관없는 것처럼 구니까 좀 그렇다더라.”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은 순간 얼어붙었다. 나는 마을 청소에도 참석했고, 이장님이 부탁한 쓰레기 분리수거도 도왔으며, 행사가 있을 땐 반드시 얼굴을 비췄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예상 밖의 방식’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당에 텐트를 설치하고 하루쯤 책을 읽는 날이 있었다. 나는 캠핑 분위기를 내고 싶었고, 일상에 변화를 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마을 어르신들에게는 그 모습이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저 집은 왜 집이 있는데 밖에서 자나?”
나는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이웃들 눈엔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시골에서는 말이 많지 않다. 대신 시선이 많다. 그리고 그 시선은 무척 오래 남는다. 누군가 한 번 튀는 행동을 하면, 그것은 일시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라 지속적인 평가의 축적이 된다. 그 이후의 모든 행동은 그 첫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된다.
이런 사회에서 살려면, 단순히 ‘나답게 살겠다’는 의지보다 ‘어떻게 이해받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시골은 타인에 대해 금방 판단하지 않지만, 한 번 형성된 인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나를 설명하려고 했다. 왜 내가 그 시간을 보내는지, 어떤 취미를 갖고 있는지, 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지를, 때때로 직접 풀어냈다.
그 결과, 몇몇 사람들과는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한 어르신은 “젊은 사람이라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이상하게 봤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튀는 사람’은 때로는 ‘설명 없는 사람’이었고, 그 설명이 이어지면 ‘조금 다른 방식의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제 나는 다르다는 것을 감추지 않고 조율한다
귀촌 3년차가 된 지금, 나는 여전히 이 마을에서 혼자 산다. 여전히 클래식 음악을 틀고, 마당에서 책을 읽으며, 간혹 텐트를 치고 하루를 보낸다. 바뀐 게 있다면, 이제는 그것이 ‘이상한 행동’이 아닌 ‘그 사람 스타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이 변화는 결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나는 ‘다름을 드러내되, 튀지 않게 조율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 마을 행사나 모임엔 항상 10분 일찍 도착했다. 말은 적지만 행동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 혼자만의 생활 방식은 이웃에게 먼저 설명했다. “책 읽는 게 취미예요”라는 한마디만으로도 시선은 달라졌다.
- 명절이나 김장처럼 중요한 시기에 직접 나서 도왔다. 사람들은 행동을 기억한다.
-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방식도 존중했다. 내가 다르다는 건 그들 역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했다.
이런 생활 방식은 ‘튀지 않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었다. 나는 여전히 도시인스러운 감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감성이 이 마을에 섞일 수 있는 방법을 경험으로 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