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현실 20편 : 가을은 농사의 결과가 아니라 ‘몸의 고장’으로 돌아온다
도시에 살 때 가을은 늘 편안하고 설레는 계절이었다.
하늘은 높고, 공기는 선선하며, 카페 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고 커피한잔 하고 싶은 날들이 이어졌다.
걷기 좋고, 나들이 가기 좋고, 어디든 낙엽이 깔려 운치 있는 계절.
대부분의 사람은 가을을 ‘결실의 계절’로 떠올린다.
하지만 시골에서 세 번째 가을을 맞이한 지금,
나는 가을을 말할 때 ‘무너진다’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시골에서의 가을은
단순히 ‘수확’의 시기가 아니다.
그건 곧 온몸을 혹사하고, 잠을 줄이며,
자신을 갈아넣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텃밭은 하루가 다르게 작물이 익고,
잡초는 그 속을 비집고 자라며,
과일은 제때 따지 않으면 썩기 시작한다.
김장 준비, 고추 말리기, 마늘 건조, 땅 뒤집기,
그리고 이웃과의 나눔까지.
가을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남는 건 수확물이 아니라
통증, 피로, 탈진, 체력 저하다.
수확의 기쁨? 그건 착각이었다
귀촌 1년차, 나는 가을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고추, 고구마, 감자, 대파, 가지, 상추, 마늘, 양파…
텃밭에 정성스럽게 심었던 것들이
가을이 되면 나를 뿌듯하게 해줄 줄 알았다.
실제로 처음 며칠은 기분이 좋았다.
고구마를 캐던 날,
밭에서 나는 흙냄새를 맡으며 웃음이 났다.
고추를 바구니 가득 따서 마당에 말렸고,
옥수수를 삶아 가족과 나눠 먹으며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양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고구마는 1~2박스가 아니라
12박스 넘게 나왔다.
고추는 마당을 다 덮고도
계속 땄어야 했다.
텃밭은 제철 작물들이
순차적으로가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익는다.
이건 마치
일주일 안에 모든 업무를 처리하라는
초과근무 명령 같았다.
수확은 일회성이 아니다, 반복 노동의 연속이다
고추는 따서 끝이 아니다.
씻고, 말리고, 다시 걷고, 선별하고 보관해야 한다.
고구마도
캐고, 말리고, 썩은 거 골라내고 박스에 포장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수확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
무거운 상자를 하루에도 수십 번 옮겨야 했고,
햇볕에 장시간 노출되어 탈수 증상이 오기도 했다.
가을 해는 봄보다 더 따갑고 강했다.
결국 나는 10월 말,
고관절 통증과 어깨 염좌 진단을 받았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는 말은,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시골의 가을은 작물을 따는 시기가 아니라,
‘몸이 먼저 망가지기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가을의 나눔은 따뜻하지만, 체력은 더 소모된다
시골에서의 가을은 단순한 수확을 넘어서
‘이웃과의 나눔’까지 포함된 사회적 활동이기도 하다.
감자를 수확하면 일부는 이웃집에 나눠줘야 하고,
고추를 말릴 때도 함께 돕는다.
김장 시즌이 되면
각 가정이 번갈아 가며 일을 도우러 간다.
이건 마을의 문화이자 규칙이다.
‘정’이라는 문화가 체력을 더 요구한다
도시에서라면
수확한 작물을 냉장고에 보관하고 끝났을 일이다.
하지만 시골에선
누구에게 얼마를 나눌 것인지 고민하고,
박스를 나르고,
돌려받은 작물도 다시 정리해야 한다.
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한다
“고구마 따면 한 열 집은 나눠야지.”
“올해 김장하면 거기 집도 도와줘야겠어.”
이 말들은 따뜻하다.
하지만 현실은 피곤하다.
하루 종일 김장 도우러 갔다가
자기 집 김장은
밤 10시 넘어서야 시작하는 일도 있었다.
일이 끝나도 정신은 더 바빠진다
나눔이 끝나고 나면
감사의 인사,
선물에 대한 답례,
소소한 마을 대화,
다음 행사에 대한 언질까지
관계 유지 업무가 이어진다.
체력적으로도 지치고,
심리적으로도 피곤해지는 계절.
그러나 시골에선
그걸 무시할 수 없다.
그건 마을에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사회적 노동’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을이면 육체적 노동보다
이웃들과의 관계를 신경쓰는 일로 더 지친다.
그래서 11월이 되면 하루 중 1~2시간은
마당에서 멍하니 앉아 회복 시간을 갖는다.
그것마저 없으면 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고장나기 시작한다.
가을은 겨울을 준비하는 ‘생존의 계절’이다
시골에서 가을은
단지 수확의 시기가 아니라
겨울 생존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따뜻한 옷, 연료비, 난방 준비, 수도 보온, 장작 쌓기…
겨울엔 야외 작업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가을 안에 모든 것을 준비해둬야 한다.
겨울 준비는 한 달 안에 끝내야 한다
땔감 확보
수도 배관 열선 설치
창문 단열 시트 부착
고추·마늘·양파 보관 정리
정전 대비 배터리 충전
김치냉장고 점검
비상식량 확보
가스·등유 확인
이 모든 일을
수확과 나눔 사이에
틈틈이 해야 한다.
내가 이 모든 걸 스스로 처리한 첫 해,
11월이 되자 체중이 4kg 빠져 있었다.
어깨 통증, 허리 통증, 손목 통증이
동시에 찾아왔다.
이쯤 되면
가을은 단순히 피곤한 계절이 아니라
“육체적 고장”이 발생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가을을 버티기 위한 내 방식
- 작물의 양을 줄였다.
한 해 농사를 하며
너무 많은 작물을 심지 않기로 결정했다.
도시처럼 ‘수익’보다 ‘유지 가능한 양’이 더 중요하다. -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과거엔 혼자 하려 했지만
이젠 김장이나 수확 일부는
돈을 들여 인력을 쓰거나
마을 주민과 교환하는 방식을 쓴다. - 일정을 분산했다.
10월에 모든 걸 몰아서 하려 하지 않고,
9월 중순부터 수확을 분산시켰다. - 회복 일정을 넣었다.
일주일에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을 정해
몸이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줬다.
그 결과,
올해 가을은
처음으로 ‘심각한 고장 없이’ 넘어가는 가을이 되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