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시골살이 현실 32편 : 시골의 ‘정’이 피로하게 느껴질 때

eoil0023 2025. 7. 9. 18:24

시골로 내려왔을 때 내가 가장 놀랐던 건 사람들의 따뜻함과 다정함이었다. 도시에서는 이웃과 일 년을 살아도 얼굴 한 번 마주치지 않는 게 자연스러웠지만 이곳에선 며칠을 살아도 이름을 묻고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다. 첫 날부터 이웃이 반찬을 가져다주었고 마을회관에서 새로 왔다며 나를 소개했고 텃밭에 심을 고추 모종이 필요하다고 하니 어느 집 아주머니는 묻지도 않고 남은 걸 가져다주셨다. 그 모든 행동이 너무나 다정하고 정겹게 느껴졌고 나는 이곳에서 드디어 사람 냄새 나는 삶을 살게 되었구나 하고 감탄했다. 귀촌 전에는 ‘시골 사람들은 폐쇄적이다’라는 말이 많아서 조금 걱정했지만 막상 겪어보니 그건 편견이었고 오히려 도시보다 따뜻한 마음이 곳곳에 스며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정’이라는 것이 그저 따뜻하고 고마운 감정이라고만 느꼈다.

시골살이 현실 : 시골이 정이 피곤하게 느껴질 때

마음의 경계 없이 다가오는 온기

하지만 그 따뜻함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버거워지게 느껴지게 시작했다. 무언가를 베풀면 반드시 답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생겼고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마음 한구석에 피로가 쌓이기 시작했다. 도시에서는 누군가가 반찬을 가져오면 ‘고맙다’ 한마디면 끝나는 일이었지만 시골에서는 그다음 단계가 늘 따라왔다. 몇 끼 지나지 않아 나도 뭔가를 해서 돌려줘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예의 없다’는 말이 나올 수 있고 심하면 ‘그 집은 맘이 차다’는 식의 소문이 돌 수 있었다. 한 번은 이웃 아주머니가 반찬을 여러 가지 가져오셨는데 감사 인사를 드린 후 그냥 넘겼더니 일주일 뒤 마을회관에서 “그 집은 새로 왔는데도 정이 없네”라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말이 그냥 흘러간 말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돌처럼 마음에 남았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싶어졌다. 하지만 시골은 그런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다가오고 더 묻고 더 연결되려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종종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움”이라는 말에 숨어 있는 압박

도움을 주겠다는 말은 늘 선의로 다가오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그건 내가 해줄게요”라는 말이 한두 번일 땐 정말 고마웠지만 나중엔 그 말이 오히려 내가 직접 뭔가를 시도할 기회를 빼앗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일을 하려 하면 옆에서 “그건 그 집이 도와줄 거예요”라며 자연스럽게 결정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정작 나는 아무것도 주도하지 못하고 그저 수동적으로 도움을 받는 위치에 머무는 일이 많아졌다. 반대로 내가 도움을 줘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마을 일이라며 갑자기 전봇대 옆의 쓰레기를 같이 정리해달라 하거나 누가 안 보인다고 혼자 확인하러 가보라는 요청도 있었고 때로는 이웃이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와 트럭을 몰고 따라와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도 있다. 이런 일들은 처음에는 인간적인 신뢰로 해석되었지만 나중에는 ‘거절하면 안 되는 관계’라는 압박으로 다가왔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도움 속에는 무언의 의무가 있었고 나는 점점 나 자신의 시간이 아닌 타인의 요청으로 하루를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인사 안 했어?”라는 한마디가 남기는 무게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 산책을 하다가 마을 어귀에서 한 어르신을 마주쳤는데 잠깐 고개를 숙였을 뿐 말을 건네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날 오후 다른 분을 통해 “아까 그 어르신 섭섭해하시더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나는 너무 놀랐고 동시에 위축되고 놀랐다. 인사가 ‘선택’이 아니라 ‘의무’로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는 내 기분이나 상황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이후로는 마을 길을 걸을 때마다 항상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누굴 마주치면 먼저 인사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생겼다. 나는 인간적인 예의를 지키고 싶지 않다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순간까지도 감정을 내어줘야 하는 구조가 불편했다. 그렇게 반복되다 보면 내가 아닌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행동하는 삶이 되고 그것은 나를 점점 작고 납작한 사람으로 만들어갔다. 시골살이에서 인간적인 연결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걸 알면서도 그 연결이 때때로 나를 잠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과 거리 사이, 균형은 가능한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수없이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끊어낼 수는 없고 완전히 맞춰줄 수도 없다면 그 사이 어딘가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사는 정중하되 대화를 길게 이어가지 않고 도움은 받을 땐 확실히 감사 인사를 하되 반복적으로 받지 않으려고 했고 마을 행사에 무조건 참석하기보다는 미리 양해를 구하고 빠지는 방식을 택했다. 이런 방식이 모두에게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만의 리듬이 생겼고 이웃들도 나를 그런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시골에서는 한 번의 행동이 평판이 되기 때문에 처음이 중요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패턴으로 인정받게 된다. 나는 내 방식대로 정을 주고받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했고 그것은 나에게도 이웃에게도 더 편안한 관계를 만들어주었다. 시골에서의 인간관계는 도망칠 수 없는 구조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그 안에서 내 숨 쉴 공간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때로는 ‘정’이 아니라 ‘통제’로 느껴지는 순간들

시골의 정은 따뜻하지만 어떤 순간엔 그것이 통제로 느껴질때도 있다. 언제 나왔는지, 오늘 어디 다녀왔는지, 왜 어제는 마당에 불이 안 켜졌는지에 대해 은근히 묻는 질문들이 반복되면 처음엔 관심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나중엔 감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내가 혼자 있는 날이나 밖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은 날까지 누군가의 시선이 따라오면 나는 더 이상 내 공간이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시골 공동체의 특성상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 관심이 지속될수록 나는 점점 더 경계심을 갖게 되었고 마음을 닫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거절이 쉽지 않은 환경에서 거리를 두는 법은 ‘무심한 듯’ 대응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결코 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지만 그 방법이 항상 마음과 일치하진 않았다. 정이라는 감정이 따뜻함에서 시작되어 억압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고 나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갈등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제는 조금씩 알 것 같다. 시골에서의 삶은 단지 공간의 변화가 아니라 관계의 방식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라는 것을. 도시에서는 거리 두기가 관계의 기본값이었다면 시골에서는 연결이 기본값이고 거리를 두려면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 많다. 나는 그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배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지금은 나의 패턴을 설명할 수 있고 이웃의 감정도 조금은 읽을 수 있으며 그 균형 안에서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정을 주고받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 여전히 피로할 때도 있고 가끔은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커질 때도 있지만 예전처럼 도망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제 이 삶 안에서 숨 쉴 틈을 찾았고 그 틈 안에서 사람들과 조금 더 건강하게 연결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있다. 시골의 정은 여전히 나에게 따뜻함과 피로를 동시에 주는 감정이지만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왜냐하면 그 감정은 이 삶의 일부이자 나 자신을 변화시킨 가장 현실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