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시골살이 현실 12편 - 봄, 농사보다 더 바쁜 계절의 시작

eoil0023 2025. 7. 1. 18:35

도시에서 살 때, ‘봄’은 단지 계절의 변화에 불과했다. 패딩을 벗고, 벚꽃이 피면 나들이를 가고, 카페 야외 자리에 앉는 정도의 일상이 전부였다. 하지만 시골에서 맞이하는 봄은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봄은 그 자체가 ‘일’이며 ‘전투’의 시작이자 ‘사회생활’의 본격적인 재가동이다. 보통 사람들은 봄이면 농사철이 시작된다고만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농사보다 더 먼저, 더 바쁘게 몰아치는 일들은 따로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골 마을 특유의 ‘시작 의식’과 ‘공동체 의무’, 그리고 ‘생활 기반 재정비’다.

겨울 동안 마을은 거의 정지 상태처럼 돌아간다. 사람들도 조용하고, 서로의 방문도 뜸해진다. 하지만 봄이 시작되면 마치 시간이 다시 흐르듯, 마을 전체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 움직임은 곧 ‘해야 할 일’들의 폭풍으로 이어진다. 집 주변을 정리하고, 잡초를 제거하고, 텃밭을 준비하고, 이웃들과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마을 회관의 대청소와 쓰레기 분리 작업까지. 이 모든 것이 농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어진다. 나는 첫 해 봄을 맞이하며, 농사 이전에 내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서 이미 탈진할 뻔했던 경험이 있다.

 

시골살이 봄, 바쁜 계절의 시작

겨울을 버티고 다시 맞이한 첫 봄, ‘일상 복구’라는 큰 산 

겨울이 길고 혹독할수록, 봄은 반갑기도 하지만 동시에 ‘두렵게’ 느껴진다. 겨울 동안 얼었던 수도관은 해동되었는지 확인해야 하고, 보일러에 생긴 문제는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마당과 텃밭은 낙엽과 쓰레기로 뒤덮여 있고, 지붕과 배수로에도 이물질이 가득하다. 마치 몇 달간 방치된 세상을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봄이 오자마자 장갑을 끼고 하루 종일 마당 정리부터 시작했다. 자라난 잡초를 뽑고, 고장 난 외등을 수리하고, 얼었던 창고 문을 정비하고 나니 하루가 훌쩍 지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어느 날 아침, 마을 방송에서 ‘이번 주 마을 청소 및 회관 정비’ 안내가 흘러나왔다. 아직도 체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빠질 수 없다는 생각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회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이미 어르신들이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고, 나는 유리창을 닦고 쓰레기를 모았다. 그 일이 끝나고 나자, 이장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번 주엔 도랑 치기도 해야 할 것 같소.”
도랑 치기란 마을 길가를 따라 흐르는 배수로를 정비하는 일인데, 매년 봄마다 돌과 흙을 걷어내야 한다. 이 역시 ‘의무’라기보다는 ‘관습’에 가깝지만, 참여하지 않으면 무언의 거리감이 생긴다.

이처럼 시골에서는 봄이 곧 ‘사회적 노동’의 재개를 의미한다. 단순히 개인의 생활만 바쁜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일들에 스스로를 맞춰야 한다. 이것이 시골에서 봄을 버티는 방식이자,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농사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들 – 몸과 마음이 바빠지는 구조 

많은 사람들이 “시골은 농사 때문에 힘들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힘든 것은 농사 그 자체보다도, 그 앞단계에서 쏟아지는 준비와 주변 일들이다. 첫 해 나는 너무 순진했다. 모종을 사기 전에 땅만 잘 갈아놓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텃밭을 정리하려면 먼저 울타리를 고쳐야 하고, 물 빠짐을 확인해야 하며, 미리 퇴비를 섞어 두어야 한다. 삽질보다 더 힘든 것은, 해마다 반복되는 “올해에는 뭘 더 해야 할까?”라는 불안감이었다.

또한, 시골에서는 봄이 되면 사람이 ‘사회적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겨울에는 집 안에만 있었기에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그럭저럭 이해받을 수 있었지만, 봄이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마당에서 일하다가 옆집 어르신과 마주치면 반드시 인사를 나눠야 하고, “올해는 뭐 심을 거예요?”라는 대화에 준비된 답변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관계의 재연결을 의미한다. 말이 오가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은 ‘요즘 저 집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식의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봄에는 마을 행사도 많다. 산불예방 캠페인, 도로변 나무심기, 하천 정비, 종교 단체나 복지센터의 봉사 방문까지 다양하다. 그 모든 행사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빠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외톨이가 되어간다. 나는 초기에 너무 바빠서 몇 가지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요즘 왜 안 보여요?”, “몸이 안 좋으신가요?”라는 질문이 자주 들어왔다. 관심이기도 했지만, 그 안에는 ‘사회적 리듬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묘한 시선이 담겨 있었다.

이처럼 농사보다 더 먼저 다가오는 것은 ‘사회적 준비’다. 땅보다 먼저 마음을 고르고, 사람보다 먼저 관계를 정비해야 비로소 농사를 지을 여유가 생긴다. 시골의 봄은 땅과의 전쟁이기 전에, 인간관계와의 협상으로 시작된다.

 

봄이 주는 새로운 감정, 그리고 시골살이의 리듬 찾기 

봄이 바쁜 계절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바쁨 속에서도 특별한 감정이 피어난다. 추운 겨울을 이겨낸 뒤 마당에 핀 민들레 한 송이는, 마치 내 몸속에도 봄이 찾아왔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이른 아침, 아직 찬 기운이 남은 공기를 마시며 텃밭에서 흙을 만지는 순간, 나는 도시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한 ‘생명감’을 느낀다. 땅이 숨을 쉬고 있고, 나도 함께 살아나고 있다는 실감.

봄의 바쁨은 단지 물리적인 일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골살이에서는 ‘계절의 리듬’을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계절 변화에 민감해진다. 겨울 동안 잠들어 있던 나의 생활 감각이 다시 깨어나고, 이웃들과의 관계도 다시 호흡을 맞춰야 한다. 나는 이 리듬에 적응하면서, ‘느긋하지만 규칙적인 삶’이 무엇인지 서서히 이해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달력과 시계가 삶의 기준이었지만, 시골에서는 햇빛과 바람, 꽃의 개화, 이웃의 문 열림 소리가 시간의 기준이 된다. 봄은 그 시작점이다. 동시에 시골살이의 방향성을 다시 점검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나는 해마다 봄이 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자문한다. “올해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질문은 단순한 계획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 다짐이다.